RETHINK REWEAR RECYCLE

라벨이 말하지 않는 것들

최원형

옷에 딸린 추억이 몇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아이보리색 점퍼가 그렇다. 유난스레 춥거나 더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외출하실 때면 그 점퍼로 의관을 가지런히 하셨다. 소매 끝이 나달거릴 때까지 입으셨는데 그 시절엔 너나없이 그랬다. 설빔, 추석빔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옷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게다가 옷을 대하는 태도는 또 얼마나 각별했는지. 식구 중 누군가의 옷이 바닥에 있는 걸 모르고 밟았다가 어머니에게 혼쭐이 났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주름 스커트는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 덕분에 2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가을이면 한두 번 꺼내 입곤 한다. 입을 때마다 아직 젊은 엄마를 떠올리게 되다 보니 주름 스커트는 내게 타임머신 같다. 그런데 이 옷을 내 딸이 물려 입을 것 같진 않다. 세상엔 옷이 차고 넘치도록 많으니까. 이제 더는 옷이 귀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옷장이 터져나갈 듯 옷은 빼곡한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고민을 되풀이 하는 이 기이함의 끝에 패스트 패션이
있다.

쉼 없는 유행을 만들어내며 이제 옷은 일회용품으로 전락해버렸다. 비싼 값을 주고 산 옷이라면 일회용일 수가 없다. 옷값이 싸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2013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외곽에 있던 라나플라자 붕괴 사고로 천 명이 훌쩍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이 턱없이 저렴한 임금을 받고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피로 짠 옷을 입지 않겠다는 소비자들의 외침도 없진 않았지만 여전히 의류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임금은 지나치게 낮다.

전 세계 폐수의 20%가 의류산업에서 나온다. 의류산업은 염색이라는 공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오염이 상당하다. 환경규제가 허술한 지역에 공장을 지으면 공정에 들어가는 오염처리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저개발국가로 의류기업이 몰리는 이유다.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에 있는 노이얄 강은 맑던 물이 녹색에 허연 거품이 부글거리는 강으로 변했다. 그 물로 농사를 짓던 이들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염색공정에는 오염 뿐 아니라 물 소비도 상상을 초월한다. 매년 의류 염색에 올림픽 수영장 2백만 개를 채울 정도의 물이 쓰인다. 청바지 한 벌 만드는데 적어도 7000리터의 물이 필요한데 한 해 청바지만 40억 벌이 생산되니 의류 공장이 있는 지역 주민들이 물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저렴한 의류가 가져오는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이상 둘 곳이 없어진 옷들은 의류 수거함을 거쳐 저개발국가로 이동한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가나의 수도 아크라 바닷가에는 그 지역주민들이 산 적도 입은 적도 없는 의류 쓰레기들로 일상이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아크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아프리카 최대 중고의류시장인 칸타만토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중고의류를 실은 컨테이너가 도착한다. 가나 인구가 대략 3,000만 명인데 매주 수입되는 중고의류는 대략 1,500만 개쯤 된다. 잘 사는 나라에서 떠넘겨진 이 많은 옷이 이곳에서 다 소화될 리 만무하다. 저개발국가는 폐기물처리시스템이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다 보니 팔리지 않은 의류 쓰레기가 산을 이루며 강을 잡아먹고 바다를 오염시킨다. 우리나라 의류수거함을 거쳐 수출하는 중고의류 규모는 세계 5위다. ‘made in Bangladeshi’, ‘made in India’, ‘made in Vietnam’, 싼 옷을 쉽게 사서 입고 버리는 옷 라벨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스며있는지 이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옷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유전적으로 우리와 동일한 직계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옷을 처음 입기 시작한 때를 여러 과학적인 근거로 추정해봤더니 대략 17만 년 전이었다고 한다.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삶을 시작한 초기 인류가 옷을 필요로 했던 건 추운 지방인 고위도로 이동하면서 였다. 다른 동물과 달리 몸이 털로 덮이지 않은 우리 인류는 추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몸에 무언가를 두르기 시작했다.

의류산업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가 무려 10%에 이른다. 해운과 항공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3배에 가까운 양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생산단가를 낮춰서 싼 옷을 생산하기 위해 팔리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과잉으로 옷을 생산하는 시스템에 책임을 물려야 한다. 프랑스처럼 일단 생산해 놓고 재고의류를 소각처리 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옷에 생명을 불어넣을 중고의류 거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아직 빙기였던 그 시절 기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걸치기 시작했던 옷이 이젠 기후를 어그러뜨리며 지구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옷에 붙은 라벨이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사진

최원형 작가

환경생태 작가

KBS, EBS방송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으로 일하며 책을 통해 환경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 저서 <착한 소비는 없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라면을 먹으면 숲이 사라져>, <환경과 생태 쫌 아는 10대> 등